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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학교의 역사 교회교육의 현실, 한국의 주일학교 운동

by 주쫑 2019. 1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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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학교의 역사 교회교육의 현실, 한국의 주일학교 운동


Ⅰ. 들어가는 말

        기독교교육, 즉 “디다케”가 수행되는 장소가 가정이거나 학교거나 어떤 다른 일반 장소이거나 간에, 그것이 기독교교육이라는 이름 아래 행해지는 한, 또 그 이름에 합당한 것일수록 그것은 “교회성”을 지녀야 한다. 교회성이라 함은 모든 기독교교육의 기본적인 토대가 교회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데, 이는 기독교교육이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로서 교회의 본질이 지향하는 바를 충실히 이행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의 본질은 크게 모임과 흩어짐이라는 구조로 이해할 수 있다. 모임이란 하나님의 부르심이요, 흩어짐이란 그 부르심에 대한 인간의 응답을 말한다.(위로부터와 아래로부터의 구조) 구약에 있어서 교회는 이스라엘, 카할, 성전의 개념과 비교되며, 신약에서는 에클레시아(ecclessia)와 그리스도의 몸,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모임과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흩어짐으로 이해된다. 특별히 성서에서는 모이는 교회와 흩어지는 교회 사이의 변증적인 통일을 지향하고 있다. 교회는 말씀선포(kerygma)와 교육(didache), 그리고 친교(koinonia)를 하기 위하여 모이고, 세상을 향한 봉사(diakonia)와 선교를 하기 위하여 흩어져야만 한다. 이는 균형을 이루어야 하는데, 만일 교회가 모임에만 주력하면 이기적인 교회가 될 것이며, 흩어짐에만 주력하면 흩어짐을 지탱해 주는 근원적인 힘이 결핍된 교회가 될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교회는 모임과 흩어짐의 알맞은 조화를 이루어야만 한다. 
        교회교육은 교회라는 터전을 바탕으로 일어난다. 교회교육은 교회학교 내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교회 전체의 영적인 힘과 관계된다. 따라서 교회교육이 교회학교를 포함하는 교회 전체와 관련되므로 우리는 교회 전체가 교육을 행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교회 전체가 교육에 책임이 있고, 교회 전체가 교육한다는 말은 다섯가지의 요소를 포함한다. 첫째로, 교회 전체가 교육한다는 말은 교회가 성경에 나온 초대교회처럼 참되고 진실된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둘째로, 교회전체가 교육한다는 말은 교회에서의 교육이 주로 이루어지는 곳은 교회학교이지만, 그러나 교회학교 교육은 교회학교 밖에 있는 교회 안의 어떤 요소에 의하여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을 포함한다. 셋째로, 교회 전체가 교육한다는 말은 교회 자체가 하나님의 집단적 인격을 가진 교사라는 것을 의미한다. 넷째로, 교회 전체가 교육한다는 말은 아이에서 어른에 이르기까지 교인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의 말씀과 신앙적 인격 성장을 위해 교육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다. 다섯째로, 교회 전체가 교육한다는 말은 교회 전체가 교회 교육이 이루어지는 중요한 교육 현장임을 의미한다. 
        오늘날 많은 이들은 교회교육의 문제점이 교회성을 배제한 교육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는 곧 교회의 교회됨, 그리스도인의 자기 정체성에 대한 물음이요, 자기 고백과 응답이 결여된 형식적인 신앙을 꼬집는 말이다. 모든 신앙교육은 하나님의 구원하심에 대한 굳은 믿음으로부터 출발해야만 한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부르심을 받은 한 인간으로서의 내가, 이제 그 은혜에 어떻게 보답할 것인가, 인간의 응답적인 측면이 성실하게 균형을 이루어야만 한다. 본 수업을 통해 마포중앙교회 교회학교가 다시 한 번 우리의 자리를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란다. 


Ⅱ. 교육의 3대 유형

1. 제 1유형 - 스파르타 교육

        1) 7세-30세까지 모든 남자는 국가의 소유
        2) 페도노무스(Paedonomus)라는 군대 막사에서 군사 훈련과 전쟁 수행만을 수행함
        3) 교육은 철저하게 독재적, 군사적, 체벌적
        4) 개개인의 인격과 자유는 무시되고 무조건적인 복종만 강요

2. 제 2유형 - 아테네 교육

        1) 철저한 개개인의 자유와 창조성 강조
        2) 민주적 시민 양성
        3) 교육은 인간 중심적, 철학적, 이성적
        4) 개인주의의 위험성을 낳았음. 공동체성의 결여

3. 제 3유형 - 유다식 교육

        1)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으로 아이를 키움
        2) 가정, 회당, 학교나 유기적인 관계 속에 모든 어린이 양육에 합심
        3) 특색 : 역사적 기억으로서의 교육과 공동체적인 교육
        4) 문제 : 지나친 선민의식, 배타적, 독선적
Ⅲ. 유대인의 교육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신앙의 핵심은 출애굽 사건이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고난에서 건져내셨던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을 가능하게 했던 민족적 사건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지금까지 흘러 내려오는 동안 계속되는 심각한 변화와 나라 없는 지긋지긋한 타향살이 그리고 정치적 위험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지켜준 것은 바로 이 출애굽 사건에 대한 살아 있는 증언이었다. 그 사건이 증언될 때마다 그 사건의 주역이셨던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은 히브리 사람들의 가슴 속에 되새겨져 왔다. 이 약속은 율법으로 언약 되었었고 그것은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증언자들에 의해 성실하게 전수되어 왔다. 바로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종교 교육이었다. 
        출애굽 사건을 경험하지 못했던 후손들에게 출애굽 사건은 어떻게 생동하는 현재의 사건으로 재현될 수 있었는가? 그 대답은 바로 “쉐마(shema)”라고 불리는 신명기 6:4-9에 잘 명시되어 있다. 쉐마에 언급된 바와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 그것이 교육의 처음이요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세대를 거듭해 하나님의 백성된 이들이 지켜야 할 규례였다. 


1. 유대인의 가정교육

        1) 토라 중심의 교육
        유대인들의 교육은 가정을 중심으로 그 기초를 닦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대인들의 가정은 ‘토라’(Torah)를 중심으로 한 하나님 중심의 교육이념을 가르치는 일차적인 교육기관이었다. 가정에서의 부모는 일차적으로 율법을 가르치는 일로부터 인성 교육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교육적 책임을 지니고 있었고, 어린이를 가르치는 것 이외에도 여러 가지 의식을 행해야할 의무가 있었다. 

        2) 예배 중심의 교육
        예    배
        출생의식 : 신생아를 물로 씻기고, 소금을 뿌리고 강보에 싸는 의식
        할    례 : 출생 후 8일 되는 날 남자 아이에게 행하는 의식
        성년의식 : 13세가 된 아이가 성년이 되어 하나님의 율법에 책임을 지게 된다는 의식

        3) 상징을 통한 교육
        Zizit - 목걸이 장식
        Tefillin - 13세 이상 된 남자들이 기도시에 사용하는 것이다. 성경 말씀을 손목에 매달고 미간에 붙이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가죽으로 만들어진 작은 두 개의 통이 사용되었다. 그 속에는 성경말씀 중의 네 구절(출 13:1-10, 10-16, 신 6:4-9, 11:13-21)을 기록한 양피지가 들어 있었다. 이것에 가죽끈을 달아 하나는 손목에 매고 다른 하나는 이마에 동여 매어 촉각을 통하여 그 말씀의 내용을 명심하게 하였다. 
        Tallit - 의복
        Mezuzah - 이스라엘 백성들은 집을 출입할 때마다 문설주에 있는 메주자(율법을 기록한 양피지)를 손가락으로 만지고 축복을 기원했다. 메쥬자는 성경 말씀의 두 구절(신 6:4-9, 11:13-21)을 기록한 양피지로서, 이들을 나무나 금속으로 되어진 갑 속에 넣은 후 이를 사람이 거주하는 집의 모든 문의 문설주에 붙이게 하였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그 문을 통과할 때마다 메쥬자 위에 손을 얹고서 “여호와께서 나의 출입을 영영토록 지키시리로다”라고 말한 후 메쥬자 위에 입을 맞추었다. 


2. 유대인의 학교교육

        1) 포로 이후 성전에서의 토라 교육 : 신앙적 반성으로 인한 결과
        2) 회당에서의 토라 교육 : ‘하잔’을 통한 토라 교육이 순수한 목적
        3) 유대인의 학교교육
        - 벳 하세퍼 : 초등교육기관, 성서와 토라를 주로 가르침.
        - 벳 함 미드라쉬 : 중등교육기관, 성서와 토라에 대한 주석을 가르침.
        - 아카데미 : 유대인 최고의 교육기관, ex) 얌니아


3. 초대 공동체의 교육

        1) 초신자 세례예비학교
        - 남녀노소, 유대인과 비유대인을 불문하고 새신자들을 교육하기 위한 기관
        - 수학기간은 2-3년
        - 이 학교의 목적 : 지식 교육이 아닌 교리와 신앙생활 훈련이 목적


        2) 교리문답학교
        - 개종자들을 위한 학교, 후에는 세례예비자학교와 별반 다르지 않게 되었으나, 특징은 있었으니, 교리문답학교는 헬라와 로마의 학문을 지닌 교인들을 대상으로 그들에게 그에 걸맞는 기독교 교육을 시키는 것이었다.
        - 교회 지도자들을 양성하기 위한 학교



Ⅳ. 주일학교 교육의 역사

        주일학교의 기원은 1780년 로버트 에릭스에게로 돌아가게 된다. 만일 주일학교 운동을 레익스로 보지 않을 경우, 이 운동의 기원은 다시 1763년 영국 감리교의 경건한 한나 볼에게 돌릴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미국인들은 미국에서 최초로 주일학교를 시작한 사람은 감리교의 창설자인 웨슬리를 창립자로 말하려고 한다. 웨슬리는 1735년 조지아주의 선교사로 있을 때 주일날 어린이들을 교육시킨 것으로 알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주일학교 운동은 1820년에 이르러 실시되었기 때문에 주일학교의 기원을 영국보다 앞섰다고 볼 수는 없으므로 근대주일학교 운동의 창시자는 역시 영국의 레익스에게로 돌리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1. 영국의 주일학교

        레익스 시대에 일반 대중들은 신체적으로, 도덕적으로 비참한 상태에 있었다. 그는 헐벗고 굶주리고, 감옥에 수감된 자들을 돕고자 애썼다. 그러나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얻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는 무지와 빈곤, 악과 범죄의 악순환을 깰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였다. 이런 것을 추방할 수 있는 방법으로 레익스는 ‘주일학교’를 생각하였다. 
        1780년 초에 로버트 레익스는 용무가 있어 글라우체스터 시외에 가게 되었다. 그 근처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생산 공장에 고용된 노동자들이었다. 우연히 그는 거리에서 놀고 있는 어린이들을 관찰하게 되었는데,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극단적인 욕뿐이었고, 그들의 행위는 매우 난폭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한 처참과 부도덕을 예방하기 위해 로버트 레익스는 주일날 그들을 가르치기로 결심하고 어느 교회에 요청하게 되었는데, 그 교회는 두 가지 이유로 그의 요구를 거절하였다. 그 첫째 이유는 이러한 무식한 노동자의 어린이들을 가르치면 사회에 혁명이 일어나기 때문에 안된다는 것이었으며, 둘째 이유는 주일날 어린이들을 가르치는 것은 주일을 범하는 죄를 짓는 것이기 때문에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에 할 수 없이 레익스는 글라우체스터에 있는 한 여인의 부엌을 빌어 처음으로 주일학교 교육을 시작하게 되었다. 읽기, 쓰기, 셈하기를 가르쳤고, 성경을 가르치고, 도덕과 예절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성경교육이 그의 교육의 목적은 아니었으나 레익스는 성경교육을, 도덕교육을 위하여 활용할 수 있는 최고의 책으로 선택하였다. 성경교육은 도덕교육을 위한 기초로 제시하였다.

        1) 산업화로 얼룩진 18세기 영국사회 : 도시화, 공장화, 인구 이동, 상류층의 타락, 하류층의 노예화(폭동 전야)
        2) 신문업자겸 사회사업가인 Robert Raikes(1735-1811)가 가진 사회적 비젼이 1780년 7월 어느 주일 첫 Sunday School 시작(오전 10시-오후 5시) 그것은 교육이라기 보다는 노동 청소년들을 감싸고 또 돌보고 사랑하는 공동체 교육이었음.
        3) 1783년 전국에는 25만명의 청소년이 Sunday School의 학생이 됨.

*노동 청소년에 대한 교회의 무관심에 대응하여 뜻 있는 한 평신도의 비젼과 헌신으로 시작된 Sunday School 운동은 수백만명의 청소년의 정신적 변화와 영국사회 변화를 가져왔다.

        4) 영국 주일학교운동의 공헌
        - 영적 각성의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 영국사회의 모든 계층들에게 무상교육을 받을 수 있는 자극제가 되었다.
        - 선교에 필요한 각종 종교서적들이 출판되었다.
        - 여성교육에 큰 영향을 미쳤다. 


2. 미국의 주일학교

        새로운 세계 안에 살고 있던 자선가들은 월버포스그룹이 지도력을 행사하기 전에 주일자선 학교의 모형을 영국으로부터 들여왔다. 미국의 독립전쟁이 끝나던 해로부터 7년후에 필라델피아인들이 첫 번째날 협회를 만들고, 펜실바니아 조직을 영국의 폭스가 하던 식을 그대로 빌려다가 그대로 모방하였다. 
        필라델피아 주일학교협회는 도시의 가난한 집 아이들을 위하여 보통학교의 체계로 출발하였다. 최초의 주일학교운동은 1780년 이전 뉴잉글랜드 여러 주에서 초기 청교도들의 손에 의하여 현대주일학교와 비슷한 학교가 설립되었다. 
        미국교회는 처음에는 주일학교를 탄압하였다. 주일학교를 하나의 교육기관으로 인정하고 승인한 것은 감리교회였다. 1790년 남카롤리나 주 찰스톤에서 모였던 연회에서 정식 승인하였을 뿐 아니라, 교회 안이나 혹은 교회 근처에 반드시 주일학교를 설치하도록 결정하였다. 1820년대의 미국 주일학교 교육의 목적은 어린이의 회심을 준비시켜 신앙을 갖게 하는 일과, 성서를 가르치는 일이었다.

        1) Sunday School은 영국에서 시작되었으나, 200년 동안 꽃피우고 확산한 것은 미국이었다.
        2) 영국의 레익스가 자선적 동기에서 사회개량에 목적을 두었으나 미국에서는 순전한 종교적 색채를 띠고 일어났다.
        3) 이 시기에 미국은 독립전쟁으로 매일학교가 폐쇄되고 어린이 교육이 불가능하게 됨으로, 교육의 파산으로 국민의 도덕이 부패되고, 미국내 도처에서 문맹이 채워짐으로 이런 상황에서 미국의 주일학교 운동을 일으키게 되었다. 

        헌데, 이러한 주일학교 운동은 몇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첫째로, 교회는 주일학교 교육 뿐만 아니라, 교회교육이라는 것 자체를 교회의 주변기관이나 무관심한 상태로 방치한 나머지 일부 열심있는 이들에 의존한 교육을 면치 못했다. 둘째로, 기성교회의 무관심 속에 새로운 복음주의적 부흥운동이 주일학교 교육을 흡수하면서 단순히 교회교육을 구원과 양적 성장을 위한 발판으로만 이해하게 되었다. 
        즉, 이와 같은 문제는 교회와 교육의 분리, 목회자와 평신도의 분리라는 측면에 잇댄 결과였다. 교회의 본질적인 차원에 이미 교육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육은 언제나 주변을 맴돌았고, 또한 교회교육은 온전한 신앙적 인격을 성장시키는데 초점을 둔 것이 아니라 양적 성장을 위한 구원에 초점을 두었기 때문에 기형적 성장을 가져오게 되었다. 또한 목회자의 직무와 수요가 교회교육의 요구를 수용하기에는 무리가 있으므로 주로 평신도들이 중심으로 이루어진 교육은 교회교육이라는 본질적인 측면에서 신학적 토대의 부재, 교회적 통일성을 저해하게 되는 역기능을 가져오게 되었다. 가령, 미국의 18세기 중반 제 1차 대각성운동(조나단 에드워드)을 통해 주일학교 운동이 시작되었고, 19세기 2, 3차 대각성운동(찰스 피니)이 이어졌지만, 온전한 신앙인격을 형성하는데 여러 가지 문제점을 드러냈다. 이는 미국이라는 사회의 특성이기도 하지만, 미국의 주일학교 운동이 지니는 약점을 여실히 드러낸 것이었다. 


3. 한국의 주일학교 운동

        우리 나라에서는 19세기 말 미국의 선교로부터 주일학교의 시작을 보게 되는데, 이를 크게 3기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1) 제 1기
        1기는 1885년에서 1919년 3 ․ 1 운동때까지로, 이 때에는 선교사 중심의 교육이 이루어졌고, 교재들도 미국의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당시 서구 문화를 갈구한 한국인에게 서구 문화를 대표하는 기독교의 교육은 강한 설득력을 가졌고, 성서적인 배경, 특히 구약의 출애굽, 신약의 로마와 이스라엘의 관계 등은 당시 일제 침략기의 우리 국민들에게 큰 힘이 되었다.

        2) 제 2기
        제 2기는 3․1운동 이후에서 1945년 해방까지로, 3․1 운동 이후, 교육으로 민족을 깨우치자는 강한 열망에 힘입어 주일학교 운동이 기세를 펴던 시기였다. 당시는 주일학교가 교세 확장에 크게 기여했다고 하는데, 주일학교는 교회 내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주일학교를 먼저 보급하고 그로 인해 성도를 늘리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이런 주일학교도 30년대 이후 일제의 간섭이 심해지더니 40년대에는 교회가 모두 일제 손에 넘어가 교회는 암흑의 나날을 보내야 했다.

        3) 제 3기
        제 3기는 해방 후부터 현재까지다. 광복 이후 첫 15년간 어린이 주일 학교와 청소년 주일 학교는 대성황을 이루게 되었으나 여전히 한국의 실정에 알맞은 교재는 나오지 못했다. 즉 양적으로는 비대하나 그 질적인 면에서는 빈약한 시기였다. 60년대 이르러서야 교회 교육에 대한 반성이 시작되었지만, 이미 교회학교는 계속 후퇴를 거듭하였고, 젊은층의 이탈로 말미암아 교사난에 허덕이게 되었다. 

        미국에서 꽃 피운 주일학교는 1905년 선교연합 공의회 안에 주일 학교 위원회를 설치한 것을 기점으로 한국 땅에도 그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한국에 상륙한 주일학교운동은 오히려 일본인들의 박해가 심해질수록 그것에 대응하는 화산의 분화구인 양 부흥과 확산으로 폭발해 갔다. 그리고 주일학교교육을 통하여 복음의 능력이 한국인의 의식 혁명을 가져왔을 뿐 아니라 주일 학교를 통하여 새로운 문화가 창조되어 갔던 것이다. 그러기에 영국에서의 주일학교이든, 미국에서의 주일학교이든, 한국에서의 주일학교이든, 그것이 가지는 한 가지 특색은 주일학교는 “교육” 행위이기 이전에 “영적 운동”이었으며, “문화 창조”의 행위였다는 사실이다. 이제 우리는 물어봐야 한다. 과연 우리의 주일학교 교육이 영적인 운동이며 문화를 창조하는 교육인가?
        지금 한국교회는 문제와 가능성 모두를 가지고 있다. 이제 주일학교 교육에 대해 날카로운 문제 분석과 아울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창조적, 개혁적인 몸부림을 과감히 시도해야 할 때라고 본다. 



Ⅴ. 오늘의 교회교육

        대다수 현대의 교회 학자들은 현대의 개신 교회가 교회의 본질과 의미를 실현시키는 데 실패했다고 본다. 하워드 그라임즈는 그의 「구속적 교회」라는 책에서 미국의 교회와 유럽의 교회들을 비판하고 있다. 그는 미국교회는 심한 활동주의에 빠져 교회는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현체가 아니라, 인간 도덕과 그것의 향상을 위한 기관으로 전락하였다고 본다. 미국 교회는 복음의 사도인 목사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전문가적 지도자들을 환영하였다. 따라서 그라임즈는 미국 교회가 좀 더 큰 것, 우수한 조직력, 회원을 얻는 능력, 훌륭한 교회 건물과 같은 외적인 형태에 치우치게 되었다고 비판한다. 그라임즈는 유럽 교회도 역시 비판하고 있는데, 유럽 교회는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무능하고 유럽 교회의 성직은 평신도를 자극하고 인도하는 것을 수행하는 사역이 아니라, 오히려 제도적인 것을 통제하고 지배하는 계급적인 것이라고 비판한다. 
        여기에 한국 교회도 예외일 수는 없다. 한국의 교회도 역시 선교 100년 동안 놀라운 발전과 부흥을 이룩했지만, 너무 빨리 부흥되었던 탓인지 그것에 의한 부작용 속에서 통증을 앓고 있다.
        이러한 세계 교회들의 추세에 따라 여기저기서 성서를 근거로 하여 “교회를 교회되게 하자(Let the church be church)"라는 움직임이 태동하고 있다. 20세기 초에 칼 바르트가 하나님을 좁은 인간의 사고에 한정시키려 했던 19세기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하나님되게 하자“라는 표어를 내건 것처럼 20세기 후반인 요즈음의 표어는 ”교회를 참된 교회처럼 되게 하자“이다.
        그런데 교회를 교회되게 하려는 노력은 두가지 점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첫째는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아야 하고, 다음으로 그것을 근거로 하여 실천에 옮겨야 한다는 점이다. 첫째것이 교회라는 존재를 이해하려는 것이라면, 두 번째 것은 집단적인 인격으로서의 교회의 행위를 실천에 옮기려는 노력이다. 교회 이해를 정확히 하고 실천에 옮기지 않아서도 안되고, 그러한 이해 없이 실천만을 하면 다시 부패되기 쉽다. 교회 이해와 그 행위는 항시 역동적 관계성을 갖고 있는 것이며, 둘 사이에는 상호간에 보완이 이루어져야만 한다. 말하자면 교회의 본성에 관련된 토의는 매일매일의 교회 생활의 영역으로 옮겨져야 한다는 뜻이 되겠다.
        요컨대, 이러한 교회 이해와 교회의 행위, 이론과 실천을 연결시켜 주는 매개체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기독교 교육이다. 기독교 교육이 서야 할 자리는 바로 이론과 실천의 중간 지대인 것이다. 왜냐하면 기독교 교육이라는 말은 이미 그 말 속에 이론과 실천을 함께 포함하기 때문이다. 참된 교회 이해를 전달하는 것도 기독교 교육이며, 교회의 잘못된 행위와 실천을 교정시켜 주는 것도 기독교 교육이다.
        기독교 교육은 여러 가지 영역이 있다. 교회학교 교육, 평신도 교육, 신학교 교육, 가정 교육, 기독교 학교의 교육, 사회 봉사 기관의 교육 등 다양하다. 이러한 모든 기독교 교육은 실천을 전제로 한 이론을 가르치는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모든 교육은 이론과 실천을 연결시켜 주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 따라서 그러한 모든 교육은 이론과 실천을 연결시켜 주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 아무리 좋은 이론도 가르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가르친다는 것은 교육의 영역에 속한다. 그런고로 교회 개혁을 위해서는 이론과 실천을 연결해 주는 기독교 교육이 매우 중요하다. 이러한 기독교 교육이 행해지는 중요한 장소는 바로 교회이다. 기독교 교육의 효과적 수행을 위해서는 특정한 공동체, 즉 진정한 기독교 교회라는 환경이 요구된다. 실로 기독교 교육의 중심에 교회는 존재하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선교를 해야 하는 것처럼 교육에도 주력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가 교회일 수 없을 것이다. 가르친다는 실제의 책임은 교회 회원 중의 특정한 수의 사람에게만 맡겨지는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교육에 대한 책임은 온 교회 전체에 지워진 일이다. 교육은 교회의 본질에 속하는 일이다. 만일 그 기능을 소홀히 하는 교회가 있다면 그 교회는 교회로서의 본질에 반드시 갖추어져 있어야 할 불가결한 한 요소를 잃어버린 교회인 것이다. 개체 교회를 교회되게, 교인들을 참 그리스도인답게 하는 데에도 교회의 교육적 기능은 필요 불가결한 것이다. 따라서 복음이 순수하게 전해지지 않는 교회가 결함 있는 불완전한 교회일 수밖에 없는 것처럼, 교육적 기능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교회는 결함을 지닌 교회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우리는 오늘의 교회교육을 되돌아보며, 새로운 방향전환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1. 오늘의 교회교육의 문제점

        1) 교육 목표

        2) 교육 내용

        3) 교육 방법
        4) 교회학교 교사

        5) 교회학교 행정
        - 교육 위원회 : 담임목사, 교육 담당 목사나 전도사, 교육부장, 교육부 총무, 교회학교 총무, 서기, 회계, 각 부 부장
        - 업무의 효율성
        - 교육의 체계화

2. 주일학교 교육의 역사를 통해 본 교훈 

        1) 그리스도인됨을 가르쳐야 한다.

        2) 예배, 교실교육, 소그룹 활동의 모임과 선교, 전도, 봉사와 섬김의 흩어짐이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3) 가르침과 배움의 과정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완전함에 이르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4) 수준의 문제가 아니라 열정의 문제요,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생각의 전환이 문제다.

        5) 교회성을 기반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3. 초대교회의 신앙을 통한 교회교육의 방향전환

        1)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임재하고 부르시는 하나니 앞에 응답하는데서 - 모이는 공동체

        2) 세우시고 양육하시는
        하나님 안에 참여하는 데서 - 세우는 공동체

        3) 보내시는 하나님의
        파송 앞에 섬김으로 증언하는데서 - 흩어지는 공동체
        이 세가지의 경험 - 부르심, 세우심, 보내심 - 앞에 응답, 참여, 증언하는 3차원의 리듬을 살아가는 것이 신앙이다.(온전한 신앙)
4. 주일학교 교육의 방향전환

        1) 예배 회복을 통하여 주일학교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응답의 사건을 극대화한다. 

        2) 교실교육과 소그릅 참여를 통하여 어린이 교회는 하나님의 세우심에 참여토록 한다.

        3) 선교이 비젼과 섬김의 실천을 토하여 어린이 교회는 세상으로 내보내시는 하나님의 파송에 헌신토록 한다. 

        
Ⅵ. 나가는 말

        교회와 교회학교를 이야기함에 있어 너무 외형적이고 기술적인 이야기만 한 것 같다. 교회는 그 출발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고백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할 때 이런 고백을 통한 그리스도와의 만남은 인간의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이루어진다. 즉, 만남의 사건은 교회교육이라는 현장에서 이루어지게 되므로, 만남이라는 영적 차원의 사건은 교회 교육이라는 전문적, 기술적 차원과 합치될 때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만남을 위한 교육구조와 내용을 전문화하여야 하는 문제는 시급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만남은 궁극의 목표이다. 따라서 교육 구조와 내용은 교회학교를 실험장으로 하여 끊임없이 변화 향상되어야 할 것이다. 교회가 교육을 회복할 때 교회는 비로소 존재 가치를 되찾게 되며, 그것은 교회의 본질을 찾는 초석이 되는 것이다.
        한편 교회와 교회학교의 일반적 관계성을 지지성, 통일성, 분리성으로 설명할 수 있겠다.
        첫째, 교회와 교회학교 관계의 지지성이란, 교회는 교회학교를 전반적으로 지지해주고 지탱해 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교회학교의 문제는 교회 전체의 문제이며, 교회학교의 교육은 교회 전체의 책임이라는 말과도 상통되는 것이다. 교회는 신앙적으로, 행정적으로 영적 분위기로써 교회하교를 도와주고 지지해주고 지탱하게 해야 한다.
        둘째, 통일성이란 교회와 교회학교가 하나의 전체 교회를 이룬다는 점이다. 따라서 교회라는 말은 교회학교라는 말을 포함한다. 그런데 오늘날의 많은 교회들은 이러한 통일성과 교회가 교회학교를 포함한다는 점을 무시하는 경향이 짙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교회들은 어린이들을 교회 구성원을 위한 매우 중요한 목회적 대상이라고 보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날으 한국 교회들은 교회와 교회학교의 이러한 통일성을 회복해야만 한다.
        셋째로, 분리성이란 교회학교는 교회 안의 작은 교회라는 뜻이다. 교회학교가 교회 전체에 흡수되어 교회학교의 존재가 유명무실해져서는 안된다. 항상 교회와 교회학교는 통일성과 분리성의 긴장 속에 있어야 한다.
        분리성이란 교회학교가 교회 안의 하나의 작은 교회로서 그 안에서도 독립적으로 디다케와 코이노니아, 디아코니아와 케리그마가 일어나야만 한다. 교회가 세상에 봉사하는 것처럼 교회학교도 완전히 교회 안의 하나의 교육기관에 불과하다는 위치를 떠나서, 교회학교도 그 자체적으로 세상을 향한 선교와 봉사, 코이노니아, 케리그마가 일어나야만 한다. 
        교회는 교육과의 올바른 관계를 다시 회복하여야 한다. 칼 바르트가 그의 「교회 교의학」이라는 책에서 말한 대로, 교회는 가르치는 교회가 되어야 하고, 듣는 교회가 되어야만 한다. 가르치는 교회는 성서에 증거된 계시 안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오류와 부패할 가능성을 갖고 있는 인간이 새롭게 들을 수 있도록 한다. 듣는 교회는 그러한 하나님의 말씀에 순복하는 것이다. 가르치는 교회와 듣는 교회로서의 교육적 사역을 우리는 되찾아야만 할 것이다. 이것이 오늘의 교회교육이 회복해야 할 최우선의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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