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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안 성도 를 아십니까?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요? '가나안성도 신앙생활탐구'

궁금상자 2018. 12. 27. 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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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나안 성도’에 대한 이슈가 한국교회 내에서 새롭게 제기 되고 있다. 가나안 성도는 누구이며, 또 한국교회는 그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하는 주제다.

  
▲ 실천신대원 등 주최 '가나안 성도' 관련 세미나

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21세기교회연구소(소장 정재영)와 한국교회탐구센터(소장 송인규)가 공동으로 주최한 2018 연구세미나가 ‘가나안 성도 신앙생활 탐구’라는 주제로 지난 11월 30일 한국기독교회관에서 열렸다.

이날 세미나에서 정재영 교수는 ‘가나안 성도 신앙의식 및 신앙생활 조사 발표’라는 주제로 송인규 소장은 ‘교회는 가나안 성도를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라는 주제로 각각 발제를 했다.

‘가나안 성도’는 자신이 개신교인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제도권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성도들을 지칭한다. 다시 말해 기독교인이라고 말하면서 교회에는 나가지 않는 이들을 의미한다.

  
▲ 정재영 교수

재영 교수는 한국 기독교인의 약 20%가 가나안 성도라고 통계 자료를 제시했다. 약 200만명에 해당되는 숫자다. 기독교인이라고 말하는 사람 중 5명 중 1사람은 교회를 출석하지 않고 있다는 말이다. 가나안 성도에 대해 좀더 자세히 분류한 통계 자료를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연령별로 분류를 해 보면 50세 이상이 32%로 가장 많았다. 40-49세는 31.4%로 두 번째다. 다시 말해 40세 이상이 전체 응답자 중 63.4%로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신앙생활한 연수별로 구분했을 때, 11년 이상이 78.9%로 압도적이다. 한 가지를 더 첨부해 보면, 자신의 신앙 단계를 스스로 구분했을 때 ‘기독교 입문층’이라고 응답한 이들이 58.3%를 차지했다.

위 3가지를 종합해 보면 가나안 성도는 신앙생활을 11년 이상 적지 않은 기간 동안 했음에도 불구하고 신앙이 성장하지 않은 40세 이상 중년에게서 많이 나타난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신앙생활을 수년 동안 했지만, 신앙이 성장하지 않은 채 이런 저런 봉사 등으로 탈진한 중년들이 스스로 교회를 떠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교회 불출석 이유를 묻는 질문에서 응답자 중 77%가 ‘틀에 박힌 신앙생활이 싫어서’라는 답이 압도적으로 나왔다. 이외에 ‘신앙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아서’, ‘교회의 가르침이 내 생각과 맞지 않아서’ 그리고 ‘교회 제도를 거부해서’가 각각 825, 5.1%, 6.3%로 나왔다.

정재영 교수는 “이것으로 볼 때 가나안 성도들은 자유로운 사고를 인정하지 않고 교회에서 요구하는 틀을 강요하는 것을 불편해 하고 있는 것”이라며 “그렇지만 무교회주의와 같이 의식적으로 교회 제도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고 평가했다. 교회에서 행하는 제도 등이 자신과 맞지 않을 뿐이지 교회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라는 해석이다.

가나안 성도들이 교회를 이탈한 이후 예배의 경험이 있는지에 대한 질문에 69.1%가 ‘있다’고 응답했다. 예배의 형태로는 가정예배가 56.8%, 기독교 TV나 라디오 또는 인터넷 등 매체를 통해서가 20.2% 등으로 나타났다. 이에 대해 정 교수는 “온라인/모바일 매체가 생활 밀착 매체가 되었기 때문”으로 설명했다.

향후 교회에 다시 출석할 의향이 있는지에 대한 질문에 가나안 성도 52.2%가 ‘언젠가는 다시 나가고 싶다’고 응답했다. ‘가능한 빨리 나가고 싶다’의 3.7%를 합쳐 긍정적 응답이 절반을 넘겼다. ‘나가고 싶지 않다’는 응답도 29.5%라는 꽤 높은 수치를 보였다.

다시 교회를 출석한다면 어떤 교회를 선택하겠느냐는 질문에 46%가 ‘신앙생활이 올바른 목회자가 있는 교회’라는 답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교회 선택 이유 중에 ‘목사’가 가장 중요한 요소임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다음은 이번 통계 조사에 대하 정재영 교수의 ‘결론 및 제언’이다. 정 교수의 발제를 그대로 싣는다.

이번 조사 결과에서 중요한 부분을 다시 살펴보면, 먼저 가나안 성도들이 교회를 떠난 후 경과 시간은 7.7년으로 5년 전에 비해 더 줄어들었다. 또한 신앙 연수는 평균 27.8년이었고, 교회를 떠나기 전 신앙 연수는 평균 20.1년이었다. 5년 전 조사에서 14.2년이 나온 것과 비교하면 5년 이상 신앙생활을 많이 한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다는 것이다. 두 결과를 함께 생각해 보면, 최근에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더 늘어나고 있고, 이들 중 다수가 신앙생활을 20년 이상 오래 한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교회를 떠난 이유로 가장 많은 31.2%가 ‘꼭 교회에 가야겠다는 마음이 생기지 않아서’라는 교회 출석 욕구 부재를 나타냈고, 13.9%는 ‘자유로운 신앙생활’이라고 응답하여 절반 가까이가 교회라는 틀에 얽매이고 싶어하지 않는 성향을 나타냈다. 특히 가나안 성도들의 모임조차 얽매이기 싫어서 참석하고 싶지 않다는 응답이 가장 많이 나와서 이들의 강한 개인주의 신앙 성향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스스로 답한 신앙 단계는 과반수가 1단계로 기독교 입문층에 해당하였다. 이 결과만 가지고 이들이 원래 신앙이 확립되지 않았던 것인지 아니면 본래는 신앙이 확고했는데 교회를 떠난 이후 신앙이 흔들리고 있는 것인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다만 절반 이상이 구원의 확신이 있다고 응답한 것을 보면, 기초 신앙은 확립된 사람들이며 가나안 성도가 된 이후에 신앙상태는 차이가 없다는 응답이 다수였고, 3분의 1 가량이 약화되었다고 답한 것을 보면, 대체로 1~2단계의 수준이었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교회 교육의 허점을 드러내는 것이다. 20년 이상 교회에 다니면서 신앙생활을 했는데 신앙이 성숙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게다가 구원의 확신이 있고 신앙단계가 높은 교인들이 최근에 가나안 성도가 되고 있다는 사실과 <한목협> 조사 결과에서 23.0%가 가나안 성도로 파악된 것은 이른바 ‘가나안 현상’(탈교회 현상)이 개신교인 일부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개신교계 전반에 걸쳐 일어나는 현상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기존의 신앙생활이나 목회 방식이 이들의 신앙적 필요를 채워주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진 개신교인이 더 늘어나고 있다는 것은 한국 교회가 이에 대해 전혀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가나안 성도들은 신앙의 다양성을 중시하며 강요하는 신앙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고 있는데 이들의 신앙 문제와 고민에 대해 답을 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비신자를 전도하여 구원의 확신을 갖게 하는 초급 단계의 교육과 양육은 비교적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나 기초 신앙이 정립된 후에 신앙이 더 깊어지고 확장될 수 있도록 돕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는 성도들이 구원의 확신을 넘어 보다 실제적인 차원의 신앙 문제에 관심을 갖고 신앙이 성숙될 수 있도록 도울 필요가 있다.

가나안 성도들이 교회를 떠난 후에 대부분 신앙 모임을 갖고 있지 않 예배를 드린 경험도 많지 않았으며, 특히 정기적으로 예배를 드린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리고 향후 예배에 참석할 의향은, 일반 교회 예배와 혼자 드리는 예배가 50%를 넘는 가장 높은 의향율을 보이고 있으며 가정 예배는 40.6%로 조사되었다. 그밖의 매체를 이용한 예배 의향은 20%대로 낮게 나와 전통적인 예배 형태가 아니라면 아예 혼자 드리는 예배를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교회에 다시 나가고 싶다’는 의견은 5년보다 10%p 가량 줄었고, 이 중에 ‘가능한 대로 빨리 나가고 싶다’는 의견 역시 10%p 이상 적게 나와서 교회 출석 의지가 더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이들이 교회 예배에 참석할 수 있는 여건이 되도록 한국 교회의 갱신이 이루어져야 하겠지만, 이것이 단시일에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라면 가정에서 혼자 또는 가족과 예배를 드리면서 신앙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울 방안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마찬가지로 교회 밖에서도 가나안 성도들이 신앙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 단체나 사역자가 많아져야 할 것이다.

또한 가나안 성도들은 자신의 신앙 유지를 위해 어느 정도의 활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성도들에 비하면 개인 신앙생활이 매우 부족하다고 볼 수 있지만 헌금이나 기부 행위도 하고 있고 매우 적지만 영성 집회에도 참여했다는 것은 이들이 여전히 신앙인으로서의 모습을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으며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구원의 확신이 있다고 응답한 사람들은 예배 참석 경험도 높고 예배 참석 의향도 높으며 기본 신앙생활도 더 잘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서 기독교인으로서 실천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교회에 다시 나가고 싶다는 생각도 더 많이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신앙단계에 따라서는 상관관계가 없는 것으로 나타나 신앙이 강하다고 해서 교회에 나갈 의향이 높은 것은 아닌 것으로 나타났다.

앞에서 말한 가나안 성도들의 개인주의 신앙 성향은 다른 항목에서도 나타나는데, 교회를 이탈하기 전 출석하던 교회에 대한 인식 중에 신앙 다양성 불인정(66.9%), 전통에 얽매인 교회 분위기(62.1%) 등‘신앙의 유연성이 부족하다’는 인식이 전체적으로 가장 강했다. 또한 기독교 신앙을 유지하고 싶다는 의견은 90%로 나왔으나 교회에 출석하고 싶다는 의견은 55%로 나와 기독교 신앙을 갖는 것과 교회 출석하는 것을 별개의 문제로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가나안 성도들의 3분의 2 이상이 신앙은 순전히 개인적인 것이고 교회와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 근거가 될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구원의 확신 여부나 신앙의 단계에 따라서도 차이가 없는 것으로 나타나 가나안 성도들이 대체로 신앙을 교회와 별개로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교리에 대해서 가나안 성도들은 하나님의 천지창조와 예수 구원이라는 기본 교리에는 동의하지만 기독교의 유일성과 보수주의적 성경관에는 동의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가나안 성도들은 기독교 신앙이 덜 확고한 반면에 더 관용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고, 교회 출석자들은 기독교 신앙이 확고한 반면에 더 배타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어 비교가 되었다. 이들은 한국교회 일반 신도들의 가장 큰 문제점에 대하여 ‘타종교 및 비기독교인에 대한 배타성’을 첫 번째로 꼽았고, 가나안 성도로서 신앙을 유지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에 대하여, ‘교회를 출석하지 않는다고 해서 기독교 신앙을 버린 것으로 보는 편견’을 갖지 말아 달라는 의견이 압도적으로 많이 나와서 배타적 신앙관을 가장 큰 문제라고 여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가나안 성도들이 스스로 어떤 점에서 기독교인이라고 규정하는지 묻는 질문에서도 나타나는데, 절반(50.2%)이 ‘하나님의 존재를 믿기 때문에’와 ‘예수님의 대속을 믿기 때문에’라고 응답하여 교회는 떠났지만 교회 출석자들과 다름없는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을 기독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의 근거로 인식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기 때문에’(26.2%)와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 왔기 때문에’(13.2%) 등 자신이 처한 기독교 환경을 자기 정체성의 근거로 인식하는 비율과 ‘사랑, 평화, 정의 등 기독교적 가치가 좋아서’가 10.0%로 절반을 차지하고 있어서 이른바 ‘문화적 그리스도인’도 상당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결과는 많은 시사점을 담고 있다.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기독교 신앙을 갖는 것이나 교회에 다니는 것은 ‘구원을 얻기 위해서’가 ‘바른 이유’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에서는 이를 포함하여 또는 이와 다르게 여러 가지 이유로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다수 존재한다. 그리고 이들 스스로 자신이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한다. 이에 대하여 우리는 보다 폭넓은 관점을 가질 필요가 있다. 먼저 이러한 기독교인들의 존재를 현실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들이 전통적인 신앙관에 맞지 않는다고 하여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단정하거나 정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리고 이들이 바른 신앙을 가질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지만, 이것이 강요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가나안 성도들은 강요하는 신앙과 다양성을 인정하는 배타적인 태도를 불편해하기 때문이다.

교회에서는 신앙의 본질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정해진 정답철을 제시하고 있지만 오늘날에는 이에 동의하지 않고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고 있다. 이른바 포스트모던 시대에는 전통적인 교리나 가르침에 따르기보다 자기 스스로의 생각을 더 중시하는 경향이 강해지기 마련이다. 이번 조사에서 교회와 신앙에 대한 항목들 중에 ‘교회 안에서도 신앙에 대해 다양한 견해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에 대한 동의율이 가장 높게 나온 것도 이러한 경향이 반영된 것이다. 따라서 이렇게 다양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라도 교회에서 불편함을 느끼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터놓고 얘기할 수 있어야 하며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신앙이 성숙될 수 있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이것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가 기존 교회의 문제에 대한 반발이라기보다는 교회라는 틀 자체를 불편해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사실 이것은 한국교회에 더 큰 문제를 던져주고 있다. 기존 교회의 목회자나 성도의 도덕성에 문제가 있다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개선해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지만 교회라는 제도 자체를 거부한다면 사실상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조사 결과에서 교회 제도를 거부한다는 응답은 낮게 나왔지만 틀에 얽매이기 싫다는 것이 사실상 제도로서의 교회를 불편해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제는 개교회의 도덕적인 성찰뿐만 아니라 교회 제도 자체에 대해서도 근본적인 고민을 해야 할 때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에서는 4차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대량생산 대량소비 체제가 아니라 개인 맞춤형 생산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교회가 획일적인 신앙관을 추구한다면 다양해진 신앙의 필요를 채워줄 수 없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공동체라고 표현되는 교회의 본질 성격과도 맞지 않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번 조사에서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한목협> 조사에서는 일상생활에 대한 만족도를 물어보았는데, 가족관계, 성 생활, 직장생활, 친구 관계, 경제적 형편 등 거의 모든 항목에서 가나안 성도들이 교회 출석자들에 비해 만족도가 낮게 나왔고, 전체적인 개인생활 만족도도 교회 출석자들의 46.9%에 비해 34.9%로 낮게 나왔다. 그리고 가장 큰 고민은 똑같이 경제 문제라고 했지만 가나안 성도들(41.5%)이 교회 출석자들(35.1%)보다 더 높은 응답률을 보였다. 그 원인을 명확하게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교회 분쟁이나 교회에 대한 불만 때문에 교회를 떠난 경우가 아니라도 불규칙한 직장생활이나 비정규 직업 활동으로 인해 교회에 출석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일상생활에서의 만족도도 떨어질 것으로 생각된다. 결과적으로 가나안 성도들이 교회 출석자들에 비해 더 많은 갈등과 불확실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 분명한 현실에서 교회는 가나안 성도들에 대해 더 깊은 관심을 갖고 이들을 도울 방안을 마련해야 할 것이라 생각된다.

  
▲ 송인규 소장

다음은 ‘교회는 가나안 성도를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라는 주제의 송인규 소장(한국교회탐구센터) 발제문이다.

가나안 성도 지원 작전1)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는 견지하면서도 여러 이유로 제도권 교회와 결별하는 종교 사회학적 현상이 근자에 들어 큰 주목을 받고 있다. 소위 가나안 성도들의 교회 이탈 사태이다. 가나안 성도란 “기독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은 있지만 현재 교회에 출석하지 않으면서 개인적으로 신앙 생활을 하는 기독교인”2)이라고 정의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가나안 성도 연구는 대체로 왜 이러한 이탈 현상이 발생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원인 규명에 초점을 맞추어 왔다. 그런데 이번 설문 조사에서는 그러한 원인 규명 노력을 전적으로 도외시하지는 않되 그보다는 교회 이탈 후 이들의 신앙 생활이 어떤지에 관한 실태 파악을 주안점으로 삼았다.

필자는 이러한 연구 자료 및 한국 교회의 여타 형편/상황에 기초하여 어떻게 하면 가나안 성도들의 처지를 도울 수 있을지 살피고자 한다.

I. 가나안 성도 현상의 원인

그리스도인들이 가나안 성도의 길을 걷는 이유는 어느 정도 소상히 밝혀져 있다. 어떤 이는 “숨 막힘” --> “위선” --> “분쟁”의 세 가지가 교회 이탈을 초래하는 단계적 요인이라고 말한다.3) 또 다른 이는 여러 가지 이유들 중에서도 “강요 받는 신앙” “소통의 단절” “신앙과 삶의 불일치”를 주된 요인으로 소개한다.4)

(1) 세 가지 복합적 사항

필자는 가나안 성도 현상의 원인을 좀더 넓은 맥락에서 파악하고자 한다. 즉 이 현상을 촉발시킨 근본 원인을 세 가지 항목의 마음 상태 ─ 개인주의, 세속화, 교회 염증 ─ 에서 찾겠다는 것이다. 하단의 도식이 그것을 한눈에 보여 준다.

  
 

“개인주의”는 개인과 공동체에 대한 관점을 뜻하고, “세속화”는 세상의 환경이 끼친 가치관을 말하며, “교회 염증”은 제도적 교회에 의해 야기된 심적 상태를 의미한다. 이 항목들은 서로 간 영향을 주고 받는데, 특히 개인주의와 세속화 사이에는 긴밀한 연접 관계가 존재한다. 어쨌든 이 세 가지 원인이 함께 작용하여 가나안 성도 현상을 유발한다고 하겠다. 이제 각각의 원인을 하나씩 살펴보자.

(i) 개인주의.

개인주의(個人主義, individualism)는 역사적 뿌리가 깊고 다양한 의미를 가진 포괄적 용어(umbrella term)이다. 이 용어에 대한 뜻을 추적하는 일조차 과중한 작업이다. 따라서 필자는 편의상 개인주의를 “인간의 자기 파악과 표현, 삶의 방식, 공동체에 대한 이해와 참여에서 개인의 주체성, 곧 존재·인식·판단·결정 등을 강조하는 입장”5)으로 정의하고자 한다.

어떻게 하여 개인주의가 사람들의 심령 속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는가? 원래 한국은 유교적 가족주의(familism) 형태의 공동주의(communitarianism)을 지향하지 않았던가? 그렇다. 그러나 한국인의 공동주의적 태도는 1970-80년대를 거치며 크게 변모되었으니 이른 바 개인주의적 경향의 가속화 때문이었다. 이러한 사회적 변동은 한국 교회의 생태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쳐서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에 대한 태도, 목회자에 대한 태도, 그리스도인 자신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 전과는 다른 모습을 띠었다.

우선 가정이나 직장을 중요시하여 교회를 과거처럼 최우선적 공동체로 여기지 않게 되었고 [준(準)집단주의], 목회자에 대해서도 무조건적/전면적 순종이나 권위 수용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권위를 인정할 만한 근거에 입각한 바 비판적 선별 방식을 취하고 있으며 [탈(脫)권위주의], 자신을 더 이상 공동체적 맥락이나 공동체 구성원들과의 관계에서 파악하지 않고 오히려 자아를 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우선으로 하여 모든 신앙 생활을 꾸려 나간다 [선(先)자아주의].6)

오늘날에는 개인주의적 경향이 더욱 심화되어 교회에 대한 태도가 준집단주의에서 무(無)집단주의로, 목회자에 대한 태도 또한 탈권위주에서 반(反)권위주의로, 그리고 자신에 대한 태도 역시 선자아주의에서 과(過)자아주의로 전이하고 있다. 이 때문에 교회로부터의 이탈과 탈교를 당연시하게 된 것이다.

(ii) 세속화.

일반적으로 세속화(世俗化, secularization)란 종교적 가치와 제도에 밀착된 하나의 사회가 비종교적인 가치와 제도로 변모하는 현상을 뜻하지만, 세부적으로 들어가 보면 이 역시 복잡하기 짝이 없고 여러 이론들에 따라 의미가 크게 달라지는 다면적 용어이다.7) 따라서 필자는 세속화의 여러 용례8) 가운데 개개인의 정신 상태를 묘사하는 경우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이 경우에 세속화란 어떤 개인의 “관심이 궁극적(종교적) 사안으로부터 준궁극적 사안으로 크게 바뀌는 관심사적 전환(shift of attention)”9)을 의미한다. 구체적으로 예를 든다면, 사후의 운명에 대한 관심은 미미해지고 현실적 삶에서 누리는 실질적 가치에 훨씬 더 마음이 쏠리는 식의 세속적 정신 상태가 이에 해당한다.이런 의미의 세속화 경향은 서구에서뿐만이 아니고 한국 사회와 개개 구성원들 사이에서도 뚜렷이 목도되곤 한다. 1970-80년대 한국 교회의 흥왕과 발전은 여성들의 대거 참여에 힘 입은 바 크다. 그러나 오늘날은 과거에 비해 교회 봉사에 투신하는 여성들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혹자는 그 이유를 여성들의 사회 진출에서 찾는다. 이제는 여성들도 전문직 종사자들이 되었기 때문에 시간을 내기가 힘들어 전처럼 왕성한 교회 봉사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일리가 있는 설명이다. 그러나 오늘날 정식으로 직장을 다니거나 사회에 진출하지 않은 여성들 역시 교회 봉사에 힘을 쏟고 있지 않은 현황에 대해서는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이들 중 상당수는 자신의 남은 시간을 크고 작은 돈벌이에 투입한다. 아이들의 사교육비든 집안 살림을 돕는 것이든 경제적 여유를 염두에 두고 이모저모로 일을 하는 것이다. 심지어는 그런 일을 하지 않는 여성들의 경우에도 교회 봉사보다는 각종 자기 계발 프로그램이나 피트니스 클럽, 여러 가지 교양 강좌와 취미 동우회에의 참여에 시간을 쏟는다. 이것은 개인의 삶에서 종교가 차지하는 비중이 현저히 약화되었음을 보여 주는 증거인데, 분명코 세속화의 증상으로 판정이 된다.

세속화와 개인주의는 이웃 사촌이라 할 정도로 관계가 긴밀하다. 개인주의적 경향이 심화될수록 세속화의 추세는 가속화된다. 세속화의 여파가 점점 힘을 얻으면 심한 경우 교회 봉사 기피는 말할 것도 없고 아예 교회 생활의 중단이나 이탈로 이어지기도 한다.

(iii) 교회 염증.

교회 염증(ecclesial aversion)은 누구나 짐작하다시피 제도적 교회에서 발생하고 공론화되는 비난거리와 빈축 사항들로 인해 교회에 대해서 갖게 되는 비호감이나 혐오심을 뜻한다. 교회에 대한 염증이나 비호감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고 오랜 적체 사안이며, 신자·비신자를 막론하고 공통적으로 표출하는 부정적 반응이다. 2013년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한목협)>는 20명의 크리스천 오피니언 리더들에게 심층 면접을 실시했다.10) 거기에서 한국 교회 내부의 문제점으로 지적된 바는 목회자 자질 및 리더십 문제 (9명), 세속화(물질주의와 성장주의) (7명), 개교회주의 (6명) 등이었다.

세부적으로 들어가서, 목회자와 연관해서는 그릇된 목회 태도 [권위주의와 교권주의로 인한 비상식적이고 비민주적인 교회 운영], 부족한 자질 [신학적 깊이와 리더십 부족, 언행 불일치, 소통 및 공감 능력 부족], 잘못된 목회 목적 및 교회 구조 문제 [영성을 잃어 버린 상태에서 경영자, 연예인, 개그맨을 닮아 가고자 함]가 거론되었고, 성도들의 경우에는 정체성 상실로 인한 이원론적인 삶, 기복 신앙과 물질주의, 자기 편의적 신앙 생활 추구, 듣기 좋은 설교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일 등이 문제점으로 부각되었다. 이 모두 교회 염증을 촉발하기에 충분한 면모들이다.

교회 염증의 증상은 개신교 이외의 종교인들 및 비신자들에게서도 명백히 감지된다. 2017년 <(사)기독교윤리실천운동>은 한국 교회에 대한 신뢰도를 조사했다. 1,000명의 표본 가운데 193명 (19.3%)이 기독교인이었고, 나머지는 83명의 가톨릭교도(8.3%), 178명의 불교도(17.8%), 540명의 무종교인(54.0%), 그리고 6명의 기타 종교인(0.6%)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전반적 신뢰도는 30%를 밑도는 낮은 비율로 나타났다. (이것은 목회자 신뢰도나 기독교인 신뢰도도 마찬가지였다.)11) 신뢰도가 이처럼 낮다는 것은 교회 염증이 크다는 뜻이다.

한국 교회의 개선점으로 제기된 사안은 불투명한 재정 사용(26.1%), 타종교에 대한 태도(21.9%), 교회 지도자들의 삶(17.2%), 교인들의 삶(14.5%), 교회의 성장 제일주의(12.3%)였다.12) 목회자의 개선점으로는 윤리/도덕성(49.4%)이 월등히 높았고, 뒤이어 물질 추구 성향(12.5%), 사회 현실 이해/참여(11.2%), 교회 성장주의(9.3%), 능력과 리더십(7.8%), 권위주의(6.2%) 등이 나타났다.13) 또 기독교인의 사회 생활과 관련해서는 정직하지 못함(28.3%), 남에 대한 배려 부족(26.8%), 배타성(26.3%), 사회에 대한 무관심(9.4%), 기복주의(8.0%)가 지적되었다.14) 이렇듯 교회에 대해, 목회자에 대해, 일반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개선점을 요구한다는 것 또한 교회 염증의 상태가 녹록치 않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렇듯 비신자, 그리스도인, 교계 지도자들이 모두 자기들 나름대로 교회 염증을 느꼈다면 가나안 성도들은 얼마나 더했겠는가? 그들의 이탈 행위를 기릴 수는 없을지 몰라도 충분히 이해는 할 수 있다. 그들로서는 점점 심해져 가는 교회 염증의 상태를 견디지 못하고 그 울타리로부터 뛰쳐나간 것이다.

필자는 지금까지 가나안 성도 현상이 생기는 원인을 (i) 개인주의, (ii) 세속화, (iii) 교회 염증에서 찾았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제도적 교회로부터의 이탈은 개인주의나 세속화만으로도 촉발이 가능하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요인에다가 교회 염증이 부가적으로 (동시에 정도가 심하게) 작용하는 바람에 한국 교회는 가나안 성도의 대거 이탈을 목도하게끔 된 것이다.

(2) 금번 조사 보고서와의 비교·분석 및 검토

이제 필자는 가나안 성도 현상의 발생 원인이 (i) 개인주의, (ii) 세속화, (iii) 교회 염증에 있다고 주장한 바가 금번 보고서의 조사 결과와도 합치됨을 설명하고자 한다.

(i) 교회 이탈 이유.15)

여기에 나타난 8 가지 이유를 찬찬히 분석해 보면 그것들은 필자가 제시한 세 가지 원인 아래 포섭될 수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아래의 비교·분석표가 이 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세 가지 원인에 대해서는 I(개인주의), S(세속화), E(교회 염증)라는 약자를 사용하도록 하겠다.

① 교회 출석 부재 욕구16) (31.2%) --> I 및 S에 해당.
② 개인적 이유17) (18.8%) --> I, S 및 E 모두에 해당.
③ 자유로운 신앙 생활 (13.9%) --> I, S 및 E 모두에 해당.
④ 시간이 없어서 (8.4%) --> I 및 S에 해당.
⑤ 신앙적 회의 (7.8%) --> S에 해당.
⑥ 목회자에 대한 불만 (6.3%) --> E에 해당.
⑦ 교인들에 대한 불만 (5.8%) --> E에 해당.
⑧ 지나친 헌금 강조 (5.2%) --> E에 해당.

이상의 이유들을 세 가지 원인의 범주에 소속시키고 보니 “개인주의”에 속하는 것이 약 32.2%, “세속화”와 연관되는 것이 약 38.5%, “교회 염증”에 해당하는 것이 약 26.3%로 나타났다.18)

(ii) 교리에 대한 인식.19)

교리에 관한 항목은 모두 9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그 가운데 세 개의 교리 조항 ─ “기독교 외에 다른 종교에는 구원이 없다” (39.4%), “예수님은 종말에 재림하신다” (56.3%), “종말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 (64.5%) ─ 에 대한 지지율이 가장 낮은데, 이는 세속화의 상태를 반영하는 것이다.20)

(iii) 교회 이탈 전 출석 교회에 대한 인식.21)

여기에 수록된 열 두 가지 항목은 모두 교회 염증이라는 원인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① 교회에서는 신앙에 대한 어떤 질문이든 자유롭게 하지 못한다.
② 교회는 개인의 신앙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③ 교회 목회자는 권위주의적이다.
④ 교회 목회자는 욕심이 많다.
⑤ 교회 목회자는 말고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다.
⑥ 교회에서는 속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기 어렵다.
⑦ 교회 교인은 신앙과 생활이 일치하지 않는다.
⑧ 교회 교인은 다른 사람을 흉보거나 험담한다.
⑨ 교회 목회자가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드러낸다.
⑩ 교회는 전통에 얽매인 분위기이다.
⑪ 교회는 교세 확장에 몰입한다.
⑫ 교회 예배/기도 스타일이 나와 맞지 않는다.

(iv) 신앙과 교회 관계에 관한 의견.22)

이곳에 등장한 항목들은 각각의 내용에 따라 어떤 원인의 범주와 연관시킬지를 판정해야 한다.

① 신앙은 순전히 개인적인 것이므로 교회와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 I 및 S에 해당.
② 목회자의 말에 무조건 따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 I에 해당.
③ 교회 안에서도 신앙에 대해 다양한 견해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 I 및 E에 해당.
④ 설교 말씀에 대해 비평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I에 해당.
⑤ 교회 안에서도 민주적인 의사 결정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I 및 E에 해당.

필자는 지금까지 가나안 성도 현상의 원인이 (i) 개인주의, (ii) 세속화, (iii) 교회 염증임을 설명했고, 그것이 이번 조사 연구의 결과와 어떻게 합치하는지 살펴보았다. 결국 가나안 성도를 돕는다는 것은 이 세 가지 사안에 대해 어떻게 응수해야 하는지와 긴밀한 연관이 있다고 하겠다.

II. 가나안 성도들을 돕는 방안 

어떻게 가나안 성도들을 도울 것인가? 이에 대한 답변은 가나안 성도들의 이탈 현상에 대한 개인의 태도 [비난?, 수용?, 동조? 등]와 가나안 성도들이 궁극적으로 어떻게 되기를 바라는지에 대한 목표 [제도적 교회로의 귀환? 의기투합하는 가나안 성도끼리의 공동체 형성?, 가나안 성도 개개인의 성향·욕구·필요에 따른 다양한 신앙적 활로의 구축? 자유롭고 자발적인 영성 그룹에의 느슨한 참여? 등]에 따라 크게 달라질 것이다.

이상의 방안들도 가나안 성도들을 돕는 데 의미를 부여하고 실효성을 나타내겠지만, 필자는 조금 다른 성격의 방안을 모색하고자 한다. 그것은 가나안 성도 현상을 초래한 세 가지 원인 ─ 개인주의, 세속화, 교회 염증 ─에 대응하는 식으로 도움의 길을 고려해 보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말하는 “도움”이란 꼭 가나안 성도가 원하는 대로의 승복이 아닐 수도 있다. 단지 이 세 가지 원인 하나하나에 초점을 맞추어 대응 방안을 강구하는 것이 주된 목표이다.

(1) 개인주의와 가나안 성도들에 대한 도움 

(i) 개인주의에 대한 심층적 탐구.

필자는 이 글의 초두에서 개인주의를 “인간의 자기 파악과 표현, 삶의 방식, 공동체에 대한 이해와 참여에서 개인의 주체성, 곧 존재·인식·판단·결정 등을 강조하는 입장”이라고 정의했다. 그런데 이것만 가지고는 개인주의와 가나안 성도 현상 사이의 관계를 파악하기가 힘들고, 가나안 성도 현상의 합당성을 판정하는 것 또한 난관에 봉착한다. 따라서 개인주의와 더불어 몇 가지 연관 개념을 함께 고려하는 것이 필요하다.

** 개인(個人, individual): 국가나 사회, 단체 등을 구성하는 낱낱의 사람.23)

** 개체성(個體性, individuality): 개인으로서의 주체적·독자적 속성.24)

** 이기주의(利己主義, egoism): 다른 사람이나 사회 일반에 대해서 배려하지 않고 자신의 이익이나 행복만을 고집하는 사고방식. 또는 그러한 태도.25)

** 공동체(共同體, community): 운명이나 생활, 목적 등을 같이하는 두 사람 이상의 조직체.26)

** 공동주의(共同主義, communitarianism): 자유주의 정치 이론 고유의 것으로 이야기되는 개인주의를 배척하고, 사회를 단지 개인의 자유와 자기 결정을 보호하고 장려하기 위한 것으로 보는 입장에서는 접근할 수 없는 집합적 성격의 가치와 목표 ─ 예를 들어 문화적·국가적 가치들 ─를 강조하는 사회·정치 이론.27)

** 전체주의(全體主義, totalitarianism): 개인은 민족이나 국가와 같은 전체의 존립과 발전을 위해서만 존재한다는 이념을 바탕으로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하고 정부나 지도자의 권위를 절대화하는 정치 사상 및 정치 체제.28)

상기 개념 가운데 먼저 유의해야 할 바는 “개체성”과 “개인주의”를 구별하는 일이다. 개체성은 개인이 갖는 개별자적 특성이기 때문에 언제나 합당하고 성경으로부터도 인증을 받을 수 있는 개념이다.29) 교회가 공동체이고 그리스도인이 공동주의적 관점을 유지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동시에 공동주의가 전체주의 (혹은 불건전한 집단주의)로 퇴행하지 않으려면 각 그리스도인의 개체성을 인정하고 주장하는 일 또한 함께 강조되어야 한다. 이처럼 개체성은 누구나 인정해야 하고 언제나 장려되어야 하는 합당한 개념이다.

그러나 개인주의는 다르다. 개인주의는 그 자체로서 합당성 여부가 결정되지 않고 그 성격이 어떠한가에 따라 합당하지 않은 형태의 개인주의 [자기 중심적 개인주의]와 합당한 형태의 개인주의[자기 통제적 개인주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자기 중심적 개인주의는 개인의 책임보다 개인의 권리를 앞세우고, 타인의 권리는 무시하거나 백안시하는가 하면, 공동체에 대한 무관심을 특징으로 한다. 반면 자기 통제적 개인주의는 개인의 권리보다는 책임을 우선시하고, 타인의 권리를 인정·존중하며, 공동체적 가치 또한 배제하지 않는다.

자기 중심적 개인주의는 개인주의가 자기 편의주의, 이기주의, 자기 중심주의와 짝하거나 그런 경향으로 편중된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교회 생활과 연관시켜 본다면, 다음과 같은 사항들이 자기 중심적 개인주의의 표출로 판정이 된다.

-- 교회가 집에서 멀다는 이유만으로 자주 주일 예배에 빠짐.
-- 설교자의 메시지가 성경적이고 타당한데도 자신의 구미에 맞지 않으면 배척함.
-- 생활이 전보다 윤택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헌금액을 더 많이 줄임.
-- 취미 생활과 여흥에 시간을 많이 쏟지만 교회 봉사는 거절함.
-- 공동체 내 어려운 형편에 놓인 그리스도인을 돕는 데 전적으로 무관심함.

반대로 자기 통제적 개인주의는 개인주의가 자신의 책임·타인의 권리·공동체적 가치와 함께 발휘되므로 자기 중심적 개인주의에서 목도되는 께름칙한 사항들을 삼갈 수 있다.

그렇다면 개인주의가 가나안 성도 현상의 원인이 된다고 할 때 그것이 결코 자기 통제적 개인주의는 아니다. 그것은 자기 중심적 개인주의를 말한다. (물론 교회 이탈 현상이 세속화나 교회 염증의 원인으로도 촉발될 수 있기 때문에 꼭 개인주의가 고려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런 이탈 사례에 만일 개인주의가 개재되었다면, 그 개인주의는 자기 통제적 개인주의가 아니고 자기 중심적 개인주의라는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 자신의 책임보다는 자신의 권리만 주장하고 타인의 권리를 중히 여기지 않으며, 공동체는 안중에도 두지 않는 개인주의 [즉 자기 중심적 개인주의]는 얼마든지 가나안 성도 사태로 이어질 수 있다.

(ii) 가나안 성도들 돕기.

이제 개인주의와 가나안 성도 현상 사이의 관계를 어느 정도 명료히 정리할 수 있게 되었다. 어떤 그리스도인이 자기 통제적 개인주의의 특징을 지닌 이라면 그가 개인주의자라고 해서 교회 이탈을 감행하지는 않는다고 할 수 있다 (혹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가나안 성도가 되었다면 그것은 세속화와 교회 염증 때문이다). 반대로 그가 평소에 자기 중심적 개인주의의 성향을 나타내는 이라면 그 성향이 심화됨에 따라 얼마든지 교회 이탈을 시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자기 중심적 개인주의 때문에 교회 이탈을 시도한 가나안 성도는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이 경우 도움이란 오냐오냐하며 그의 행위를 인정하고 그의 입장을 비호하는 데 있지는 않으리라고 본다. 오히려 그로 하여금 자신의 자기 중심적 개인주의에 직면하도록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 그를 돕는 방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럴 때 우리 편에서 그를 몰아붙이는 식으로 비난하고 정죄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의 자기 각성을 유도하기 위해 강압적 수단을 동원하는 것은 가나안 이탈을 더욱 조장하는 자극적 행태가 될 수밖에 없다.

필자가 하나의 방안으로 제시하고자 하는 것은 비지시적 교육 전략이다. 이것은 학습자가 스스로 자신의 문제를 규명하고 해결책을 강구해 나가도록 도움을 주는 방안이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인의 자기 발견과 성숙”이라는 주제하에 두 형태의 개인주의를 소개하고 자신의 문제점에 직면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평소에 [가나안 성도 현상을 논하기 이전에] 교회에서나 기독교 모임에서 시도하는 것이 좋다. 요즘처럼 온라인 정보 자료가 많이 활용되는 상황에서는 직접적 대면 없는 교육 환경을 활용할 수도 있다.

물론 가나안 성도가 이런 수단을 통해 자신의 자기 중심적 개인주의 경향을 깨달았다고 해서 그가 교회 이탈을 청산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럴 리도 없고 또 지금 그것을 목표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자신의 신앙 여정에 있어서 무엇이 문제점인지 인지하고 직면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유익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또 혹시 이것을 출발점으로 하여 신앙 여정의 진로를 수정하거나 전환하게 된다면 그 유익은 더욱 큰 것이라고 하겠다.

(2) 세속화와 가나안 성도들에 대한 도움 

(i) 세속화한 행위: 두 범주로의 구분.

필자가 염두에 두고 있는 세속화가 “개인의 관심이 궁극적(종교적) 사안으로부터 준궁극적(비종교적) 사안으로 크게 바뀌는 관심사적 전환”에 대한 것임은 이미 앞에서 밝힌 바 있다. 그러한 전환의 구체적 예로서 오늘날의 여성들이 과거의 여성들과 달리 교회 봉사 [종교적 사안] 대신 돈벌이, 취미 활동 등 일상적 활동 [비종교적 사안]에 착념하는 모습을 소개했다. 이러한 비종교적 행동/활동을 가리켜 세속화한 행위(혹은 세속화 행위)라 부르겠다.

그러면 이렇게 세속화한 행위 [돈벌이나 취미 활동 등]에 참여하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는가? 만일 어떤 행위나 활동을 단지 비종교적이라는 이유 때문에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한다면, 우리는 정도가 매우 심한 이원론자로 낙인이 찍힐 것이다. 오히려 성경은 비종교적인 행위라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다(고전 10:31)고 말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비종교적인 행위가 어떤 경우에는 정당화되고 또 어떤 경우에는 정당화되지 못하는가? 그 기준은 무엇인가? 필자는 여기에서 행동의 동기(혹은 목적)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거론하고자 한다.

예를 들어, 젊은 회사원 A가 아침 출근 시 복음성가를 듣다가 클래식이나 팝송을 듣는 쪽으로 방침을 바꾸었다고 하자. 이것은 종교적 사안[복음성가]으로부터 비종교적 사안[클래식이나 팝송]으로의 전환이기 때문에 세속화한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세속화 행위가 정당한지 정당하지 않은지는 그런 행위를 하는 이의 동기가 무엇이냐에 달려 있다는 말이다.30) 만일 A가 그런 음악을 바꾸어 듣는 동기가 바람직하면 그 세속화 행위는 정당한 것이요, 음악을 바꾸어 듣는 동기가 바람직하지 않으면 그 세속화 행위는 정당하지 않은 것으로 판정을 받게 된다. 이 점을 좀더 명확히 파악하기 위해 다음의 도표를 참조하라.

  
 

이처럼 A의 세속화 행위는 그 동기가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느냐 아니냐에 따라 정당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여기 또 다른 예, 가정주부 C의 경우도 고려해 보자. C는 최근에 카페를 새로 열었고 시간 사용의 문제에 부딪혀 월요일마다 교회에서 담당하던 선교관 봉사 책임을 내려놓게 되었다. 이 역시 명백히 세속화한 행위의 예이다. 그런데 C의 행위는 정당한가 정당하지 못한가? 역시 이 경우에도 C가 수행한 행동의 동기가 어떠냐 하는 것이 중요한 관건으로 작용할 것이다. 만일 C의 동기가 바람직하다면 그의 세속화 행위 또한 정당한 것으로 판명이 날 것이요 C의 동기가 바람직하지 않다면 그의 행위 역시 정당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될 것이다. 역시 도표의 도움을 받자.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C의 세속화 행위 또한 그의 마음 속 동기가 무엇이냐에 따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합당한 행위로 판명이 날 수도 있고, 아니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부당한 행위로 규정될 수도 있다.

(ii) 가나안 성도들 돕기.

이제 우리 앞에 당면한 사안은, “그렇다면 가나안 성도의 교회 이탈 행위는 하나님 앞에서 정당화될 수 있는가?”하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 역시 지금까지 취급한 방식을 좇아 판정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우선 가나안 성도의 교회 이탈 행위는 세속화 행위이다. 이는 교회 출석 [종교적 사안]으로부터 일반인과 같은 생활 방식 [비종교적 사안]으로의 전환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러한 세속화 행위는 정당한가 정당하지 않은가? 관건은 그런 행위의 주체자가 어떤 동기에 의해 그 행위를 수행하는지에 달려 있다. 만일 교회 이탈자가 바람직한 동기를 가지고 있다면 그 행위는 그 나름대로 정당화될 수 있을 것이고, 반대로 바람직하지 못한 동기에 기초한 행위라면 정당화될 수 없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교회 이탈 행위는 서로 다른 두 가지 동기에 의해 유발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음의 도표를 보라.

  
 

필자의 생각으로는, 왼편의 동기를 가지고 가나안 성도가 된 경우 그의 교회 이탈은 정당화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오른편의 동기 때문에 가나안 성도가 된 경우에는 그의 교회 이탈이 정당화되기 힘들게 여겨진다.

이러한 판정은 가나안 성도를 어떻게 돕느냐와 직결되어 있다. 합당하지 않은 동기로 교회를 이탈한 이들에 대해서는 무언가 말을 많이 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 주는 식으로 접근해야 할 것이다. 그들의 인생과 신앙 여정에 관심을 쏟고 궁금해 하며 질문을 던지다 보면 그들과 좀더 개인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형성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출발해 서로 간 신뢰가 쌓이면 머지 않아 대화와 의견 교환이 가능해지고 마음에 담긴 생각을 허심탄회하게 나누는 정도에까지 이를 것이다. 역시 이때의 목표도 (제도적 교회로의 복귀는 말할 것도 없고) 그를 회유하든지 견해의 변화를 촉구하는 것이어서는 별로 합당하지 않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삶을 나누고 느끼는 그대로의 마음을 소통하는 일이 중요하다.

합당한 동기로 교회를 이탈한 성도들의 경우에는 좀더 교육적 효과를 의중에 둘 수 있을 것이다. 역시 그들이 왜 과거의 교회에서 그토록 답답하고 힘들었는지 (아마 이런 점에서 교회 염증이라는 원인 또한 개재되었을 수가 있다) 개인의 사정을 가능하면 소상히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교분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그가 지녀 온 심리적 난점은 더 이상 난공불락의 장애 요인으로 남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심지어 제도적 교회 (과거의 교회는 아니라 하더라도 훨씬 건전하고 건강한 교회)로의 복귀조차 고려하게 될지 모른다.

(3) 교회 염증과 가나안 성도들에 대한 도움

모르면 몰라도 가나안 성도 현상의 가장 큰 원인은 교회 염증일 것이다. 교회 염증이란 역시 글의 앞 부분에서 언급했듯 “제도적 교회에서 발생하고 공론화되는 비난거리와 빈축 사항들로 인해 교회에 대해서 갖게 되는 비호감이나 혐오심”을 말한다.

(i) 교회 염증의 구성 내용.

교회 염증을 촉발하는 사항들은 비그리스도인과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차이가 있지만 무시해도 좋을 정도로 미미하다. 놀라운 점은 오히려 두 그룹 사이에 공통점이 훨씬 많다는 사실이다. 이번 「조사보고서」에서도 교회 이탈 이유의 마지막 세 가지 항목 ─ 목회자에 대한 불만 (6.3%), 교인들에 대한 불만 (5.8%), 지나친 헌금 강조 (5.2%) ─ 이 교회 염증에 해당한다.31) 목회자에 대한 불만 내용은 다음과 같다.32)

-- 돈과 명예에 대한 욕심이 많아서 (42.5%)
-- 자질이 부족해서 (28.1%)
-- 말과 행동이 달라서 (22.8%)
-- 나와 정치적 입장이 달라서 (3.8%)
-- 권위주의적이라서 (5.2%)

또 교인들에 대한 불만은 다음과 같은 항목들로 구성되어 있다.

-- 교인들의 삶이 도덕적이지 않아서 (39.6%)
-- 교인들 간에 분란이 일어나서 (33.8%)
-- 교인들 간의 관계가 형식적이어서 (18.7%)
-- 교인들이 배타적이어서 (7.8%)

이상의 모든 내용을 종합할 때 교회 염증의 촉발 사항은 다음과 같이 정리가 된다.

** 목회자에 대한 불만.

-- 돈과 명예에 대한 과도한 집착 (성장주의 일변도의 목회 방침, 지나친 헌금 강조 등)
-- 자질 부족 (신학적 깊이·리더십·소통 능력의 부족)
-- 언행 불일치 (저조한 윤리/도덕성)
-- 권위주의적 태도 (몰상식적·비민주주의적 교회 운영)

** 교우들에 대한 불만.

-- 교회 내에서의 관계 (교우들 간의 분란·형식적 관계·배타성)
-- 교회 밖에서의 비도덕적인 삶 (정직하지 못함, 남에 대한 배려 부족, 배타성)

(ii) 가나안 성도들 돕기.

가나안 성도 현상의 원인으로서 교회 염증은 개인주의나 세속화의 경우와 달리 그 원인의 소재가 좀더 외부적이고 그 원인의 성격이 좀더 객관적이다. 그러므로 교회 염증의 각도에서 가나안 성도들을 돕는다는 것은, 교회에 대해 염증을 일으킨 구체적 사항들이 변화나 개선의 과정을 통해 없어지거나 경감되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바로 위에서 말한 “목회자에 대한 불만 사항”과 “교인들에 대한 불만 사항”의 척결이 가나안 성도들을 돕는 최선의 방안이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불만 사항들의 척결만이 가나안 성도들을 돕는 유일의 방안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제도적 교회가 아무리 변화를 거듭해도 개인주의나 세속화 때문에 앞으로도 가나안 성도 현상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요, 또 교회 염증 때문에 떠난 이들의 경우 상당수는 제도적 교회로 복귀하고 싶어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자는 가나안 성도들을 돕는 방안에 있어서 세 가지 방면을 염두에 두고자 한다. 하나는 제도적 교회의 개혁적 노력이요, 또 하나는 대안 공동체의 활성화요, 나머지 한 가지는 비(非)공동체적 장의 마련이다. 이제 한 가지 사안씩 검토하도록 하자.

① 첫째 방안: 제도적 교회에서의 개혁적 노력.

조금 전에 말했듯 제도적 교회가 개혁의 노력을 기울이고 심지어 그에 따라 실효성이 나타난다고 해도 가나안 성도들이 반드시 그 안으로 복귀하리라는 법은 없다. 그러나 교회의 지도자들과 교우들이 교회 염증의 척결과 관련하여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여전히 중요하다. 그 의미심장성은 세 가지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교회의 개혁 노력은 꼭 가나안 현상만을 염두에 두고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교회는 원래 그랬어야 한다. 설사 가나안 성도 현상이 발생하지 않았더라도 교회의 지도자들과 교우들은 자신들의 인격과 삶 가운데 고결성을 나타냈어야 하고, 그렇지 못했을 경우 배전의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또, 가나안 성도 현상을 줄인다는 예방적 차원에서도 이런 노력은 의의가 크다. 뿐만 아니라 혹시 제도적 교회 내에서의 이런 노력이 주효하여 가나안 성도들의 신앙 회복에 직·간접으로 기여를 할 수도 [꼭 제도적 교회로의 귀환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필자는 개혁적 노력을 목회자/지도자 자신의 책임 분야와 교우들의 책임 분야로 나누어서 설명하고자 한다. 교회 염증의 척결을 위해 목회자/지도자들은 네 가지 사항에서의 노력이 요구된다.

첫째, 목회자는 지도자 특유의 탐심과 싸워야 한다. 탐심은 우상 숭배(골 3:5)라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경각심을 가질 대상이지만, 이것은 특히 목회 사역을 담당하는 지도자들의 경우에 그러하다. 이미 믿음의 선배들이 밝힌 것처럼 목회자는 돈·성(性)·권세를 근간으로 한 탐심에 취약하다. 그 가운데 명예에의 집착은 성장주의 일변도의 목회 철학을 통해서, 또 돈에의 욕심은 교회 재정의 충당 [해마다 커져 가는 교회 예산을 위한 집요한 헌금 수금 전략]이나 개인적 착복 [목회자가 교회의 공금을 자의적으로 사용하는 일]을 통해서 나타난다.

먼저 목회자는 자신이 책임을 맡은 교회나 사역지가 근본적 의미에서 하나님의 소유임을 수시로 인정해야 한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마 6:10) 진심으로 원한다면 교회의 주재(主宰)가 바로 하나님과 그리스도이신 것을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정신이 목회자를 휩쌀 때 성장주의 일변도의 목회 철학과 방침은 설 자리를 잃을 것이다.

바울은 자기 자신이 자족하기를 배웠을(빌 4:11-12) 뿐 아니라 목회자로 세움 받은 디모데에게도 자족을 중요한 덕목으로 강력히 권면하고 있다(딤전 6:6-10). 만일 목회자로 부름을 받았다고 하면서 돈을 사랑하는 경향으로부터 자신의 마음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의 소명 의식은 그렇게 소홀한 정도만큼 자기 기만적인 것이다.

목회자와 탐심은 함께 갈 수 없다. 그것이 명예에 대한 것이든 돈에 대한 것이든 말이다.

둘째, 목회자는 끊임없이 자기 발전을 꾀해야 한다. 목회자의 자질은 정체적 사안이 아니다. 즉 어느 시점에서 평가할 때 자질이 갖추어졌다고 해서 그것이 항구적으로 실효성을 발휘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혹시 과거에 좋은 자질을 갖춘 것으로 인정되었다고 해도 부지런한 자기 발전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하물며 과거에 자질이 충분히 구비되지 않은 목회자의 경우에랴?!

역시 바울은 아직 경험이 적은 디모데에게 “이 모든 일 [말, 행실, 사랑, 믿음, 정절에 있어서 본이 되는 것, 읽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는 것, 자신에게 허락된 은사를 계발하는 것 등]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딤전 5:15)고 권면했다.

따라서 모든 목회자는 목회자로서의 자질 향상을 위해 끊임없이 힘써야 한다. 신학적·목회적 연장 교육을 받고, 리더십 계발 세미나에 참여해야 하며, 설교·공적 연설·개인 대화 등에 있어 명료한 커뮤니케이션을 하도록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아야 한다.

셋째, 목회자는 높은 수준의 도덕성을 유지하여야 한다.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윤리 실천의 면에서 저급하다는 것은 부끄럽기도 하고 기이한 일이기도 하다. 우리의 행위(선행)가 구원을 받는 데는 전혀 기여를 못하지만(엡 2:8-9) 일단 구원을 받은 이로서는 선한 삶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교훈(엡 2:10)이 한국 교회에서는 크게 간과되고 있다.

이런 면에서 그리스도인은 선한 일에 힘을 써야 하고(딛 3:8), 교회는 선한 일에 열심을 내는 하나님의 친백성으로 알려져야 한다(딛 2:14).

하물며 교회의 지도자인 목회자의 경우겠는가?! 역시 바울은 지도자인 디모데에게 “행실”에 있어 본이 되라(딤전 4:12)고 권면했고, 같은 지도자인 디도에게도 “범사에 네 자신이 선한 일의 본을 보이라”(딛 2:7)고 당부했다. 그런 의미에서 목회자가 언행 불일치 때문에 지적을 받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넷째, 목회자는 권위와 권위주의를 구별해야 한다. “권위”는 리더십의 발휘에 있어서 필수적으로 획득되어야 할 조건이다.33) 그러나 “권위주의”는 다르다. 이것은 권위를 그릇된 방향 ─ 세도 부리기, 이웃에 대한 압제 ─ 으로 잘못 사용하는 일이다.

교우들의 입장에서 볼 때 목회자의 권위주의적 태도가 극명히 나타나는 영역은 교회에서의 행정 모임과 그 결정 과정에 있어서이다. 즉 교회 운영과 연관된 제반 사항의 결정에 있어서 목회자가 자신의 의견만을 내세우고 다른 이의 주장이나 견해는 은근히 억누르며 자유스런 토의 과정을 배제하는 등 독단적 태도를 보일 때 명백히 드러난다.

이러한 위압적 자세는 목회자 편에서의 무지와 오해 때문에 생긴다. 목회자가 지도자로서의 권위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것이다. 즉 목회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히 증거할 때는 그 누구나 (목회자 자신을 포함함)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목회자에 대한 순종이라기보다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순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행정적 사안의 결정이라는 영역으로 오면 상황이 달라진다.34) 목회자라고 해서 행정적 결정 과정에 대해 전권을 가진 것은 아니다. 이때에는 목회자나 회의 참석자들이나 동일한 권위를 가지고 함께 참여하는 것이다. 비록 형식상 목회자가 그 모임의 수장(首長)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 행정적 사안의 결정 과정에 있어서는 함께 의논하고 토의하고 의견을 나누는 식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목회자는 권위주의를 삼가되 특히 행정 모임에서 번번이 등장하곤 하는 권위주의적 태도를 경계해야 한다. 그래야 목회자가 비민주주의적으로 교회를 운영한다는 비난이 자취를 감출 수 있을 것이다.

교회의 개혁적 노력에는 교우들이 책임져야 할 사항들도 있다. 비록 이것조차 목회자 편에서의 올바른 교육과 훈련이 있어야 실행 가능한 바이지만, 어쨌든 실제로 행해야 할 주체자는 교우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책임 분야로 배정한 것이다. 크게 두 가지 사항을 언급하고자 한다.

첫째, 교회 내에서 교우들끼리의 교제가 활발해야 한다. 현재 한국 교회의 항시적 문제점 가운데 하나는 유기체로서의 교회적 측면이 현저히 약화되었다는 점이다. 전통적 교회론에 의하면 가시적 교회(visible Church)는 유기체(organism)로서의 측면과 조직체(institution/organization)로서의 측면을 함께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35) 그런데 조직체로서의 교회는 유기체로서의 교회가 실현되는 수단이라는 점을 명시한다.36)

이 말의 구체적 의미는 무엇인가? 조직체로서의 교회에 속한 모든 요소들 [건물, 재정, 직분, 활동 등]은 유기체로서의 교회가 지닌 본질적 특징 [그리스도의 머리 되심, 신자들끼리의 지체 됨]을 밝히 드러내고 그것이 더욱 영향력을 행사하도록 자극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현재 한국 교회를 보면 조직체로서의 교회만 강조될 뿐 유기체로서의 교회는 거의 언급조차 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유기체로서의 교회가 지닌 특징 가운데 신자끼리의 지체 의식과 상호 교제는 “서로 ∼하라”는 권면 가운데 확연히 나타난다. “서로 사랑하라”(살전 4:12; 벧전 1:22; 요일 3:11), “서로 마음과 뜻을 같이하라”(롬 12:16; 15:5), “서로 덕을 세우라”(롬 14:19; 살전 5:11), “서로 용서하라”(엡 4:12; 골 3:13) 등이 대표적 예이다. 만일 교우들이 이러한 성경의 가르침을 중시하고 실행한다면 그들 사이에 분란·형식적 관계·배타성은 괄목할 만하게 줄어들 것이다.

둘째, 교우들이 세상 속에서 소금과 빛의 삶을 살아야 한다. 한국 교회가 많이 듣는 비난 가운데 또 다른 사안이 바로 신앙과 삶의 괴리 문제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 (마 5:13, 14)이라고 하셨다. 한국 교회에 「빛과소금」이라는 잡지도 있고, <염광고등학교> 나 <빛과소금교회>도 있는데, 이렇듯 신앙과 삶의 불일치로 인해 매도를 당한다는 것은 지독한 아이러니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이제부터라도 세상의 소금과 세상의 빛이 된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올바로 파악해야 하고, 또 그 의미를 세상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살아내도록 힘써야 한다.37) 그렇게 함으로써만이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밖에서 비도덕적인 삶을 영위한다는 비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부패와 어두움을 퇴치하는 데 앞장서고 세상에 맛과 선을 구현하는 데 노심초사하는데, 어떻게 우리 가운데에서 부정직과 무례함과 배타심이 목도될 수 있겠는가 말이다.

필자는 지금까지 가나안 성도들을 돕는 일에 제도적 교회가 기울여야 할 개혁적 노력이 무엇인지 목회자의 책임 분야와 교우들의 책임 분야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② 둘째 방안: 대안 공동체38)의 활성화.

“대안 공동체”란 전통적이고 고정화된 제도 중심의 교회와 달리 비정형적이고 유동적이며 좀더 삶의 환경에 밀착한 형태의 신앙 집단을 총칭하는 표현이다. 이러한 대안 공동체는 대체로 구성원의 수효가 많지 않아 인격적이고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기에 적합하고, 권위주의적 위계 질서에 얽매이지 않음으로써 자연스레 평등과 자유를 구가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물론 이런 공동체들은 중심 리더십의 결여 때문에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우왕좌왕하기도 하고, 어느 날 홀연히 자취를 감추기도 하는 등 약점 또한 만만치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안 공동체”에 매력을 느끼는 이들이 늘어나는 것은 최소 세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상당히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성 교회의 제도적 경직성과 교권주의적 중압감에 질려서 무언가 다른 형태의 공동체가 출현하기를 은연 중에 기다려 온 때문이다. 둘째, 교회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과 교회론의 역사를 새롭게 조망하면서 현재 우리가 정형으로 받아들인 교회의 형태와 구조가 유일한 패턴이 아님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선교학자, 목회학 전문가, 목회자들은 앞을 다투어 대안 공동체의 모델을 제시했다. 셋째, 오늘날 한국 상황에서 교회를 새로이 설립하고자 할 때 과거와 같이 대형·중형 교회를 모델로 삼기가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오히려 수적으로 적은 규모의 소형 교회가 더 친근히 느껴졌으니, 이제는 소교회가 단순한 과도기적 교회가 아니라 평생 돌보아야 할 교회인 까닭이다.

이러한 세 가지 이유를 생각할 때 가나안 성도들로서는 더욱더 이런 유형의 교회에 매력을 느꼈을 것이다.

이제 “대안 공동체”의 소개에 있어 이미 실행되고 있는 경우와 이론적으로 제시만 되고 있는 경우로 대별해 보도록 하자. 먼저 이미 실행되고 있는 경우이다. 정재영은 “가나안 성도들의 교회”라 간주할 수 있는 세 곳을 방문하여 그들의 형편을 알린다.39) 이들 세 교회의 공통점은 첫째, 10∼20명 내의 적은 수가 모인다는 점, 둘째, 주일 오후에 모이고 주일 이외에는 모임이 없다는 점, 셋째, 예배 후 그날의 설교를 공동체적으로 나눈다는 점이다.

황인성은 <높은뜻 광성교회 청년부>(2009∼2014년)를 실례로 하여 대안 공동체에 대한 논문을 작성했다.40) 이 책자는 특히 선교적 교회론의 이론을 발전시키고 있다. 가나안 성도들을 위한 지속적 모임으로서의 위상을 확립한 경우로서 “세속성자 수요모임”41)이 있다. 이 모임은 청어람ARMC 대표인 양희송의 리더십 아래 2013년부터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42)

또 꼭 가나안 성도들만을 겨냥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대안 공동체의 또 다른 유형들로서 “문화사역에 초점을 맞추는 교회” “평신도 교회” “다문화 교회”43) 등이 있고, 심지어 “마을공동체” 또한 대안 공동체의 한 가지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44)

대안 공동체를 이론적으로 제시한 것은 주로 논문의 내용을 구성하고 있다. 우한별은 “가나안 네트워크 교회”45)라는 모델을 제시하고 있고, 박성원은 “가나안 성도들에 대한 목회적 지원과 돌봄의 전략”을 다섯 가지 항목으로 설명한다.46)

③ 셋째 방안: 비(非)공동체적 장의 마련.

가나안 성도들을 돕는 일은 바로 앞에서 소개한 대안 공동체의 방도가 아니더라도 이루어질 수 있다. 이것은 그들을 직접 대면하지 않고 전자 매체를 통해 접촉과 소통을 강구하는 일이다. 가나안 성도들 가운데에는 다른 그리스도인들과의 만남조차 꺼리든지 귀찮게 여기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도가 거론될 수 있는 것은 오늘의 시대가 정보화 사회로 진입하면서 각종 소셜 네트워크가 크게 활성화되었기 때문이다.47) 이것은 가나안 성도들이 다른 이들로부터의 정죄나 비난의 눈초리를 의식하지 않으면서도 얼마든지 자신들의 의견·느낌·경험 등을 나눌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뜻이다.48) 심지어 이제는 사이버 교회49)까지 등장하고 있으니만큼, 온라인을 통한 소통과 공감대 형성은 가나안 성도들에게 유익한 방편50)이 될 것이다.

필자는 지금까지 가나안 성도들을 돕기 위한 세 가지 방면의 노력 사항을 언급했다. 이것이 교회 염증의 문제를 경감하는 데 이모저모로 기여하리라고 생각한다.

가나안 성도의 교회 이탈 현상은 누차 밝혔다시피 앞으로도 절대로 그냥 누그러질 일이 아니다. 한국 교회에 속한 우리 모두는 이 문제를 앞에 놓고 끊임없이 고민하고 대책을 강구하며 하나님께 기도해야 할 것이다.

<미주>

1) 이 발제문을 작성하는 데 양희송<청어람ARMC 대표>, 이강일<한국복음주의운동연구소 소장>, 정재영<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세 분의 도움 ─ 자료 소개 및 아이디어 제공 ─ 이 있었음을 감사와 더불어 밝히는 바이다.
2) 정재영, 「교회 안 나가는 그리스도인」 (서울: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2015), pp. 17-8.
3) 양희송, 「가나안 성도 교회 밖 신앙」 (서울: 포이에마, 2014), pp. 73-93.
4) 정재영, 전게서, pp. 61-106.
5) 송인규, “개인주의 시대의 신앙 공동체,” 「목회와신학」 (2016년 9월): 161.
6) 송인규, “한국 교회와 경건 훈련: 새벽 기도회에서 QT로,” 「한국 교회 큐티 운동 다시 보기」, 정성국·지형은·송인규 (서울: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2015), pp. 185-9.
7) 이와 연관된 사회학적 이론의 계보와 발전에 대해서는, 정재영, 「교회 안 나가는 그리스도인」, pp. 163-72를 참조하라. 또 최현종, “세속화,”「21세기 종교사회학」 (서울: 다산출판사, 2013), pp. 87-105도 참조하라.
8) 어떤 역사학자는 “세속화”의 용례를 여섯 가지 항목 ─ (i) 대형 사회 조직의 분화 과정, (ii) 개별 제도의 탈종교화 사태, (iii) 교회 주도적 활동의 이양, (iv) 개인의 정신 상태, (v) 인구 집단 내 종교성 하락 현상, (vi) 기독교적인 것과 대조되는 의미로서의 용어 사용 ─ 으로 정리했다 [C. John Sommerville, “Secular Society/Religious Population: Our Tacit Rules for Using the Term ‘Secularization’,” Journal for the Scientific Study of Religion, Vol. 37, No. 2 (1998): 250-51]. 현재 필자가 관심을 쏟는 용례는 넷째 항목이다.
9) Ibid.: 250.
10) 이상화 편, 「한국기독교 분석리포트: 2013 한국인의 종교생활과 의식 조사보고서」, 개정증보판 (서울: 도서출판 URD, 2014), pp. 438-57.
11) 박제민 편, 「2017년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도」 (서울: (사)기독교윤리실천운동, 2017), p. 9.
12) 전게서, p. 11.
13) 전게서, p. 12.
14) 전게서, 동일면.
15) 「가나안 성도의 신앙의식 및 생활에 관한 조사보고서」 (서울: (주)지앤컴리서치, 2018), pp. 11-8. 이하에는 그냥 「조사보고서」로 칭할 것이다.
16) 필자는 “교회 출석 부재 욕구”의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지 못했다. 이 부재 욕구가 독자적인 이유로 존립하려면 나머지 이유들과 개념적으로 구별되어야 할 터인데, 그러한 개념적 구별의 내용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말이다. 그래서 외부의 어떤 영향 때문이 아니고 그저 “자기 스스로 교회 가기 싫어서”라고 해석을 했다. 이러한 해석에 의거할 경우 이 항목은 “개인주의”와 “세속화”에 해당이 된다.
17) 이 항목 역시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교회 생활이나 일상의 삶 가운데 어떤 점이 개인적으로 문제가 되었다고 해석을 했다. 그렇다면 이 항목은 세 가지 원인 모두에 걸린다고 하겠다.
18) 물론 이 수치는 추측과 어림에 의한 것이므로 신빙성은 별로 높지 못하다. 다만 교회 이탈의 이유가 어느 정도 세 가지 원인에 골고루 포함됨을 밝히고자 한 것이다.
19) 「조사보고서」, pp. 21-40.
20) 다소 예외적인 항목이 “하나님은 지금도 인간의 삶에 개입하신다”(68.7%)이다. 세속화를 겪은 이들이라면 이 교리 항목에 대한 지지도가 좀더 낮았어야 한다.
21) 「조사보고서」, pp. 41-66.
22) 「조사보고서」, pp. 67-78.
23)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국어사전편찬실 편, 「고려대 한국어대사전: ㄱ∼ㅁ」 (서울: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009), p. 215.
24) 송인규, “개인주의 시대의 신앙 공동체”: 164-5.
25) 「고려대 한국어대사전: ㅂ∼ㅇ」, p. 4934.
26) 「고려대 한국어대사전: ㄱ∼ㅁ」, pp. 537-8.
27) Thomas Mautner, ed., Penguin Dictionary of Philosophy (London: Penguin Books, 1997), p. 100.
28) 「고려대 한국어대사전: ㅈ∼ㅎ」, p. 5427.
29) 송인규, “개인주의 시대의 신앙 공동체”: 164.
30) 동기의 문제를 생각할 때 세속화는 어느 정도 개인주의의 문제와 연관이 된다.
31) 또 가장 백분율이 높은 두 가지 항목 ─ 교회 출석 부재 욕구 (31.2%)와 개인적 이유 (18.8%) ─ 도 (구체적 정도까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하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교회 염증과 연관이 된 것으로 추정이 된다.
32) 하기 항목들 외에 “지나친 헌금 강조” (5.2%) 역시 실은 “목회자에 대한 불만”의 한 요소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33) 이와 관련하여 송인규, “목회자의 권위,” 「목회와신학」 (2017년 4월): 136-41을 참조하라.
34) 송인규, 「형제와 연합하여 동거함이」 (서울: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1995), pp. 116-9.
35) Louis Berkhof, Systematic Theology (Edinburgh: The Banner of Truth Trust, 1958), p. 567.
36) Ibid.
37) 송인규, “직분자여,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라,” 「한국 교회와 직분자: 직분제도와 역할」, 정주채·배종석·송인규·정재영 (서울: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2013), pp. 169-80, 199-208.
38) 지성근, “탈교회? 제도 교회 밖의 교회를 상상하다” [미간행 논문]는 이러한 대안 공동체를 “선교적 교회,” “일상교회,” “교회 너머 교회,” “깊은 교회론이 건설하는 교회” 등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 주제와 관련하여 여러 가지 시사점을 던져 준다.
39) 정재영, 「한국교회, 10년의 미래」 (서울: SFC 출판부, 2012), pp. 242-4.
40) 황인성, “한국 ‘청년교회’ 대안 공동체 만들기” (장로회신학대학교 대학원 선교신학 전공 석사학위 논문, 2015).
41) 양희송, 「세속성자」 (서울:북인더갭, 2018), p. 9.
42) 이 모임은 안창덕, “가나안 성도의 대안 종교성 분석” (서강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종교학박사 학위 논문, 2018)의 주된 연구 대상이 되었다.
43) 정재영, 「한국교회, 10년의 미래」, pp. 229-46.
44) 정재영, 「함께 살아나는 마을과 교회」 (서울: SFC 출판부, 2018). 저자는 이 책자에서 국내 열 교회 및 미국의 두 곳을 소개하고 있다.
45) 우한별, “탈 제도권 기독교인을 위한 사역 연구”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목회학과 실천신학전공 석사학위 청구 논문, 2014).
46) 박성원, “‘가나안 성도’들의 탈(脫) 교회에서의 신앙경험에 대한 연구” (연세대학교대학원 신학과 석사학위 논문, 2017), pp. 187-201.
47) 정재영, 「한국교회, 10년의 미래」, pp. 129-33.
48) 실상 한때 가나안 성도였던 이성민 씨는 페이스북에 “교회를 떠났다”는 페이지를 운영했는데, 매일 10개 정도의 글이 올라올 정도로 빈번한 소통의 장이 마련되었다고 말한다 [http://www.newsnjoy.or.kr/news/ article/View.html?idxno=218091 accessed on 018-11-16].
49) 정재영, 「한국교회, 10년의 미래」, pp. 233-5.
50) 물론 소셜 네트워크, 온라인 소통, 사이버 교회 등이 항상 선한 영향만 끼치는 것은 아니므로 항시 주의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어쨌든 대면에 의한 소통을 꺼리는 가나안 성도들에 대해서는 이것이 유일의 접근 수단이라는 점에서 유익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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